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창립선언문
기후혼란(Climate Chaos)의 시대가 왔다. 홍수, 가뭄과 같은 극단적 기후현상이 일상적으로 발생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물종들이 멸종을 눈앞에 두고 있다. 동시에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인간들은 삶의 터전을 잃었으며, 심각한 기근과 경작지 감소로 인해 일부는 생존마저 위협받고 있다. 더욱 슬픈 일은 이러한 현상들이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현재의 과학적 연구는 이러한 재앙들이 지구의 온도가 전례 없이 급격히 상승하고 있는 점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를 완화하기 위한 노력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하며, 이미 시작된 기후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대책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후변화가 21세기 인류사회에 가장 중요한 의제라는 동감의 폭은 전지구적으로 점차 확대되어가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아직도 인류사회의 행동은 너무도 느리다.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시급한 행동을 가로막고 있는 걸림돌은 지금껏 화석연료에 기반을 두어서 발전해온 자본주의 시스템이다. 에너지와 자원 매장량의 한계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은 채 무한정한 생산과 소비를 통해서 이윤을 획득하려는 반(反)생태적인 사회 시스템이 피할 수 없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화석연료의 생산과 소비에 자신의 생존을 걸고 있는 자본과 이를 확대재생산하는 낡은 정치권력은 전지구적 위기를 외면하고 있으며, 오히려 사회적 불평등과 함께 이를 부채질하고 있다.
화석연료에 기반을 둔 사회 시스템에 고착된 소위 ‘탄소 잠김(Carbon lcok-in)’ 효과는 한국 사회에도 나타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석유 등의 에너지의 사용은 지난 수십 년간 꾸준히 증가해왔으며, 에너지 가격 상승과 온실가스 배출 감축에 대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줄어들 조짐이 나타나고 있지 않다. 현 정부는 과거 정부와 다르게 수사적인 측면에서 ‘녹색성장’을 앞세우고 있지만, 그 허구적 가면 아래 토건산업과 원자력산업만이 융성하고 있을 뿐 에너지 전환을 향한 진지한 노력은 찾아볼 수 없다.
기후변화 위기를 해결해나가기 위해서는 전지구적 차원에서 모든 사회 집단들이 협력해야만 한다. 이는 화석자본주의의 강력한 이해관계 동맹을 해체하고 재생에너지 이용을 확대하며 지속가능한 생산과 소비로의 전환을 향한 강력한 녹색동맹을 구축해야 할 필요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지구적으로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에, 또 한 국가 안에서는 부유한 계급과 가난한 계급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대립과 갈등이 녹색동맹을 통해서 기후변화의 위기를 극복해나갈 협력을 어렵게 하고 있다. 오히려 협력 대신에 불평등만 가득 하다. 가난한 나라와 사회적 약자들은 전지구적 기후변화에 대한 책임이 가장 작지만 그 위험에 가장 크게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기후변화 완화와 적응에 관한 국제협상이나 국내 정책에서 외면 받고 있다.
우리는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전지구적인 과정에서 가난한 나라와 노동자·농민 등 사회적 약자가 보호되어야 한다는 ‘에너지·기후 정의의 원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빈곤과 사회적 불평등이 지속가능한 발전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가난한 나라와 사회적 약자들이 주체적인 참여를 통해서 지속가능한 생태사회로 전환하는 데 기여할 기회가 주어져야 하며, 그들의 창조적인 능력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지향과 이념을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용어로 요약한다. ‘정의로운 전환’이란 지속가능한 사회로의 전환 과정에서 이에 따른 피해와 비용이 사회적 약자에게 일방적으로 전가되어서는 안 되며 정의로운 방식으로 배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로운 전환’은 강력한 녹색동맹의 구축을 위한 토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의 실현을 위해서 지식과 정책을 창출하고 이를 실천운동과 연결시키기 위해서,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를 설립하여 이에 기여하고자 한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현 에너지체제를 기후친화적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적으로 정의로운 방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비전과 담론을 개발하며, 장기간의 전환 과정을 관리해 나갈 방법론을 연구할 것이다. 또한 에너지 전환이 실제로 추진되어야 할 지역에서의 에너지 자립 방안을 연구할 것이며, 기후변화로 인해 영향 받게 될 국내외 사회적 약자의 실태를 조사하고 이를 도울 방안을 연구할 것이다. 그리고 보다 실천적으로 국내외 기후·에너지정책의 불합리성을 비판하는 현안 대응 성격의 ‘연구운동’도 병행할 것이다.
우리는 전지구적 생태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앞장서 나서며 동시에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사회적 불평등의 해결을 위해서 싸우는 국내외의 모든 개인과 조직들과 협력하고 연대해나갈 것이다.
2009. 8. 1.
창립총회 참가자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