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정칼럼] 22대 총선 결과와 기후정치 X의 현장
겁나 험한 기후선거, 여러분은 어떤 기후유권자입니까?
이정필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소장
22대 총선을 맞아 기후유권자를 찾는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기후정치바람’에 의하면, 기후정보 인지 수준이 높고, 기후위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기후 의제를 중심으로 투표할 의향이 있으면, 누구나 기후유권자에 속한다. 정책지향적 투표 행위를 뜻하는 정책투표의 대상이 기후 분야로 확대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녹색 시민이나 녹색 계급의 정체성이 있는 사람이나, 그런 거창한 분류와 상관없이 일상적으로 녹색생활을 실천하는 사람 모두 기후유권자 포지션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기후유권자라 할 수 있다. 평소 탈핵, 탈탄소 에너지전환을 기후정의와 정의로운 전환의 관점과 입장에서 이래저래 분석하고 제안하니, 어쩌면 당연한 자기 호명이다.
그러나 문제는 기후 정책투표의 스펙트럼에 있다. 이 지점에서도 악마는 디테일에 있는데, 그 핵심은 어느 정당이 기후 정당이냐, 어느 후보가 기후 후보냐에 달려 있다. 구체적으로는 국가적, 부문별, 지역별 기후 의제설정과 쟁점화에 따라, 그리고 정당 귀속감, 회고적 투표와 전망적 투표 등 유권자의 투표 패턴과 성향을 종합하여 사후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평론가 시각에서 이번 기후선거를 멀리서 바라보면 마음 편하겠지만, 그럴 수 없는 노릇이다. 21대 국회가 기후 국회가 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제대로 평가하지 않은 채 22대 국회를 전망하는 것 자체가 부조리다. 현상 유지를 전제하는 기후 자유주의(climate liberalism) 토대에서는 딱 그만큼의 기후정치가 가능하다. 운영 체계를 관리하는 자동 패치라고 할까.
현행 정당체계와 선거제도에서 거대 여당과 위성정당의 묶음은 사실상 기후투표를 방해하거나 왜곡한다. 물론 에너지 사업과 개발 사업이 현안인 선거구의 특정 후보와 정당에 대한 기대를 무조건 배제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다수당이 되면, 당선되면 열심히 잘하겠다는 선에서, 무한 피드백 루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 국민의힘을 기후 정당으로 여기는 유권자는 없을까? 더불어민주당을 기후 정당으로 지지하는 유권자는 얼마일까? 정책공약에서 상대적으로 후한 점수를 받게 될 녹색정의당은 과연 지속 가능할까?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어느 순간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민심이 폭발할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당분간 국회와 정부의 기후 리더십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오히려 기후 시민에 대한 팔로우십이 필요해 보인다. 그렇다면 기후유권자의 힘이 필수적이다. 바로 기후정치의 폐가입진(廢假立眞)이다. 기후시민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고, 스스로 주인공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최근 내외부적으로 공개된 각 정당의 총선 준비 내용과 수준을 고려하면, 아래에 열거한 정책공약들이 투표의 준거점이 될 수 있겠다.
① 그린뉴딜 3.0 실현을 위한 ‘그린뉴딜기본법’ 제정, ② ‘에너지전환특별법’ 제정 및 탈핵·탈탄소 에너지전환 정책 패키지, ③ 지역·공간별 재생에너지 자립 의무화와 자치·분권 보장, ④ 한전 발전공기업의 개혁과 통합 등 공공재생에너지 확대, ⑤ 탈내연차 판매·운행 중지 목표 설정, ⑥ 건축물 화석연료 사용 중지 및 에너지효율 로드맵 마련, ⑦ ‘농어업·농어촌 탄소중립 에너지전환법’ 제정 및 탄소중립 직불제 도입, ⑧ ‘정의로운전환법’ 제정 통한 정의로운 전환 기본계획 수립 및 전환지역·취약지역 정책 패키지, ⑨ 각종 개발사업 중지, 녹색 인프라 확대 및 ‘기후재난대응법’ 제정, ⑩ ‘기후에너지부’ 신설 및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개편, ⑪ 탄소 다배출·에너지 다소비 산업·업종의 사회적 대화 제도화 등.
적어도 나와 주변에 적용할 투표 기준이지만, 연성 이슈가 없을 정도로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다. 정책 과정에서 방향성의 정치(politics of directionality)는 한마디로 ‘누가 어떤 방향을, 어디서, 언제, 어떻게 그리고 왜 결정하는가’를 의미한다. 현재 주어진 정책 경관(policyscape)에서 이런 대안들은 많은 경우 무의사결정이나 연성화되기 십상이다. 그것으로 만족해도 기후유권자의 타이틀은 유지할 수 있다. 그렇다고 유권자에게 기후 책임을 떠넘기지 말자. 2024년, 행정부와 입법부를 구성한 이들, 정당을 이끌거나 그 외곽에 있는 이들의 책무를 시민들에게 전가해서는 곤란하다. 겁나 험한 기후선거, 그리고 그 결과를 누가 책임질 것인가?
4월 총선 전후로 기획되는 기후정치 X의 현장에서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것을 접해보자.
3월 14일,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2024년 총선, 공공재생에너지 확대를 약속하라> 공공재생에너지 선언 및 기자회견이 열린다. 10대 요구사항은 탈탄소 에너지전환의 실현 가능성을 보여준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충남노동자행진>(3월 30일, 태안)의 “석탄 발전은 멈춰도, 우리의 삶은 멈출 수 없다!”는 외침과 직결된다. 단순히 재생에너지 확대만 주장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진정성 없는 반정치적 공약(空約)일 뿐이다.
3월 16일, 을지로와 청계천에서는 <바꿔 정치! 잘해 기후대응! 안돼 핵발전! 멈춰 에너지 민영화!> 후쿠시마 핵 사고 13주년 에너지전환 대회가 개최된다. 이번 행사는 기후총선을 강조하는데, 이런 질문도 넣고 싶다. 반도체 클러스터가 들어설 용인에 300MW 정도의 소형모듈원전(SMR)을 건설하자는 이야기가 있는데, 용인과 인근 주민, 국민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첨단산업에 필요한 분산에너지를 활성화하고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에 최선의 선택이 아닌지.
4월 23일에 예정된 기후위기 헌법소원 공개변론은 2020년 청소년기후소송 이후 총 4건의 기후소송을 병합하여 열린다. 기후위기 기본권을 헌법 차원에서 논의하는 매우 중요한 사법적 프로세스이다. 공개변론 자체는 기후 인권을 공론화, 사회화하는 데 의미가 있지만, 기후소송의 결과에 따라 국회와 정부의 책임을 명확하게 입증할 헌법적 근거가 마련될 수 있다.
기후운동, 기후소송, 기후선거는 기후정치 X를 가리킨다. 22대 총선 결과는 누군가에는 승리를, 다른 누군가에는 패배를 말한다. 기후유권자는 어떻게 감각할 것인지 궁금하다. 다음 대선과 총선까지 이어질 기후정치 X를 위한 기회의 창은 열려 있다. 겁나 험하겠지만.
*본 칼럼은 레디안에 동시 게재 됩니다.
원문보기(2024.3.12.)
[에정칼럼] 22대 총선 결과와 기후정치 X의 현장
겁나 험한 기후선거, 여러분은 어떤 기후유권자입니까?
이정필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소장
22대 총선을 맞아 기후유권자를 찾는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기후정치바람’에 의하면, 기후정보 인지 수준이 높고, 기후위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기후 의제를 중심으로 투표할 의향이 있으면, 누구나 기후유권자에 속한다. 정책지향적 투표 행위를 뜻하는 정책투표의 대상이 기후 분야로 확대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녹색 시민이나 녹색 계급의 정체성이 있는 사람이나, 그런 거창한 분류와 상관없이 일상적으로 녹색생활을 실천하는 사람 모두 기후유권자 포지션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기후유권자라 할 수 있다. 평소 탈핵, 탈탄소 에너지전환을 기후정의와 정의로운 전환의 관점과 입장에서 이래저래 분석하고 제안하니, 어쩌면 당연한 자기 호명이다.
그러나 문제는 기후 정책투표의 스펙트럼에 있다. 이 지점에서도 악마는 디테일에 있는데, 그 핵심은 어느 정당이 기후 정당이냐, 어느 후보가 기후 후보냐에 달려 있다. 구체적으로는 국가적, 부문별, 지역별 기후 의제설정과 쟁점화에 따라, 그리고 정당 귀속감, 회고적 투표와 전망적 투표 등 유권자의 투표 패턴과 성향을 종합하여 사후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평론가 시각에서 이번 기후선거를 멀리서 바라보면 마음 편하겠지만, 그럴 수 없는 노릇이다. 21대 국회가 기후 국회가 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제대로 평가하지 않은 채 22대 국회를 전망하는 것 자체가 부조리다. 현상 유지를 전제하는 기후 자유주의(climate liberalism) 토대에서는 딱 그만큼의 기후정치가 가능하다. 운영 체계를 관리하는 자동 패치라고 할까.
현행 정당체계와 선거제도에서 거대 여당과 위성정당의 묶음은 사실상 기후투표를 방해하거나 왜곡한다. 물론 에너지 사업과 개발 사업이 현안인 선거구의 특정 후보와 정당에 대한 기대를 무조건 배제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다수당이 되면, 당선되면 열심히 잘하겠다는 선에서, 무한 피드백 루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 국민의힘을 기후 정당으로 여기는 유권자는 없을까? 더불어민주당을 기후 정당으로 지지하는 유권자는 얼마일까? 정책공약에서 상대적으로 후한 점수를 받게 될 녹색정의당은 과연 지속 가능할까?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어느 순간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민심이 폭발할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당분간 국회와 정부의 기후 리더십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오히려 기후 시민에 대한 팔로우십이 필요해 보인다. 그렇다면 기후유권자의 힘이 필수적이다. 바로 기후정치의 폐가입진(廢假立眞)이다. 기후시민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고, 스스로 주인공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최근 내외부적으로 공개된 각 정당의 총선 준비 내용과 수준을 고려하면, 아래에 열거한 정책공약들이 투표의 준거점이 될 수 있겠다.
① 그린뉴딜 3.0 실현을 위한 ‘그린뉴딜기본법’ 제정, ② ‘에너지전환특별법’ 제정 및 탈핵·탈탄소 에너지전환 정책 패키지, ③ 지역·공간별 재생에너지 자립 의무화와 자치·분권 보장, ④ 한전 발전공기업의 개혁과 통합 등 공공재생에너지 확대, ⑤ 탈내연차 판매·운행 중지 목표 설정, ⑥ 건축물 화석연료 사용 중지 및 에너지효율 로드맵 마련, ⑦ ‘농어업·농어촌 탄소중립 에너지전환법’ 제정 및 탄소중립 직불제 도입, ⑧ ‘정의로운전환법’ 제정 통한 정의로운 전환 기본계획 수립 및 전환지역·취약지역 정책 패키지, ⑨ 각종 개발사업 중지, 녹색 인프라 확대 및 ‘기후재난대응법’ 제정, ⑩ ‘기후에너지부’ 신설 및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개편, ⑪ 탄소 다배출·에너지 다소비 산업·업종의 사회적 대화 제도화 등.
적어도 나와 주변에 적용할 투표 기준이지만, 연성 이슈가 없을 정도로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다. 정책 과정에서 방향성의 정치(politics of directionality)는 한마디로 ‘누가 어떤 방향을, 어디서, 언제, 어떻게 그리고 왜 결정하는가’를 의미한다. 현재 주어진 정책 경관(policyscape)에서 이런 대안들은 많은 경우 무의사결정이나 연성화되기 십상이다. 그것으로 만족해도 기후유권자의 타이틀은 유지할 수 있다. 그렇다고 유권자에게 기후 책임을 떠넘기지 말자. 2024년, 행정부와 입법부를 구성한 이들, 정당을 이끌거나 그 외곽에 있는 이들의 책무를 시민들에게 전가해서는 곤란하다. 겁나 험한 기후선거, 그리고 그 결과를 누가 책임질 것인가?
4월 총선 전후로 기획되는 기후정치 X의 현장에서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것을 접해보자.
3월 14일,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2024년 총선, 공공재생에너지 확대를 약속하라> 공공재생에너지 선언 및 기자회견이 열린다. 10대 요구사항은 탈탄소 에너지전환의 실현 가능성을 보여준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충남노동자행진>(3월 30일, 태안)의 “석탄 발전은 멈춰도, 우리의 삶은 멈출 수 없다!”는 외침과 직결된다. 단순히 재생에너지 확대만 주장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진정성 없는 반정치적 공약(空約)일 뿐이다.
3월 16일, 을지로와 청계천에서는 <바꿔 정치! 잘해 기후대응! 안돼 핵발전! 멈춰 에너지 민영화!> 후쿠시마 핵 사고 13주년 에너지전환 대회가 개최된다. 이번 행사는 기후총선을 강조하는데, 이런 질문도 넣고 싶다. 반도체 클러스터가 들어설 용인에 300MW 정도의 소형모듈원전(SMR)을 건설하자는 이야기가 있는데, 용인과 인근 주민, 국민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첨단산업에 필요한 분산에너지를 활성화하고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에 최선의 선택이 아닌지.
4월 23일에 예정된 기후위기 헌법소원 공개변론은 2020년 청소년기후소송 이후 총 4건의 기후소송을 병합하여 열린다. 기후위기 기본권을 헌법 차원에서 논의하는 매우 중요한 사법적 프로세스이다. 공개변론 자체는 기후 인권을 공론화, 사회화하는 데 의미가 있지만, 기후소송의 결과에 따라 국회와 정부의 책임을 명확하게 입증할 헌법적 근거가 마련될 수 있다.
기후운동, 기후소송, 기후선거는 기후정치 X를 가리킨다. 22대 총선 결과는 누군가에는 승리를, 다른 누군가에는 패배를 말한다. 기후유권자는 어떻게 감각할 것인지 궁금하다. 다음 대선과 총선까지 이어질 기후정치 X를 위한 기회의 창은 열려 있다. 겁나 험하겠지만.
*본 칼럼은 레디안에 동시 게재 됩니다.
원문보기(2024.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