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發光] '주체'와 '지체' 사이 딜레마
기후 문제에 왜 노조가 나서야 하느냐구요?
이정희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필자는 지난 8월 '초록發光' 연재 글(☞바로가기 : "왜 노동연구자가 기후위기 문제를 다루냐고요?")에서 노동의제와 기후의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했다. 노동자들은 기후재난의 피해자이면서 온실가스 배출을 수반하는 생산 활동을 직접 수행하는 자이고, 또한 소비자이면서 공동체의 시민이므로, '먹고 사는' 문제와 '(인류가) 죽고 사는' 문제를 통합하여 고민하고 실천해야 하는 주체라는 점을 강조했다.
반응은 다양했다. 노동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업을 준비해야겠다는 다짐도 있었지만, 적지 않은 경우는 여전히 냉소적이거나 대응 모색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기후는 여전히) 우아한/고귀한 문제 같아요", "노조가 왜? (나서야 하는지?)", "조합원들 관심사가 아닙니다"와 같이 여전히 관계성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에서부터 "현장 투쟁에 바빠서…", "한가한 소리로 들려요", "그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어요", 등과 같이 당장의 임금 교섭과 단체협약 갱신 교섭, 또는 불법파견 투쟁과 같은 현안 대응을 하기에도 여력이 없다는 반응도 있었다. "들을수록 어렵네요", "노조가 뭘 할 수 있는지?", "(뭘 하자고) 나설 엄두가 안 나요", 등과 같이 고민은 되지만 손에 잡히는 노조 활동의 내용과 수단을 모르겠다는 반응도 있었고, 또한 "이런다고 뭐가 바뀌나요? 우리가 바꿀 수 있을까요?"와 같은 체념론도 있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최근 읽은 논문 하나가 생각났다.
'기후지체 담론' - 기후행동 미루기
독일에 사무실을 둔 '메르카토르 글로벌 공유지 및 기후변화연구소' 연구진은 2020년에 출간한 논문에서 기후지체 담론(Discourse of climate delay)을 4가지로 유형화하고 이를 뛰어넘기 위한 심층 연구와 실천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논문에 따르면, 기후지체 담론의 첫 번째 유형은 '책임 전가'다.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먼저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럴 의도도 없는데 우리가 온실가스 배출을 감소하면 우리만 손해 볼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두 번째 유형은 '점진적인 해법 추구'다.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면 기후변화가 완화될 것으로 기대하거나(기술 낙관론) 여전히 화석연료를 저탄소 사회로 가는 해법 중 하나로 여긴다. 또한 사회는 지원적이고 자발적인 정책에만 반응할 것이므로 무언가를 제한하는 조치는 폐기되어야 한다고 본다. 세 번째 유형은 '전환 과정의 부작용 강조'다. 화석연료는 개발에 여전히 필요한데 사용을 포기한다면 빈곤층이 어려움에 처하는 한편 현대적 삶을 누릴 기회를 빼앗길 것이고, 사회 취약집단이 그 전환의 부담을 더 크게 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네 번째 유형은 '투항'이다. 배출량 축소를 위한 그 어떤 수단도 현재의 생활방식에 반하는 것이어서 불가능하다고 보거나, 어떤 조치를 취하기엔 너무 늦었기 때문에 우리 운명을 신이나 자연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고 체념한다.
내 문제로 받아들이기
이 담론은 기후변화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것 혹은 노력이 충분하지 않은 것을 정당화한다. 기후정책에 대한 대중과 정치권의 지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는 기후위기 대응 행동을 미루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기후위기 대응의 주체가 되는 첫걸음은, 기후변화가 나의 문제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난 여름을 생각해 보자. 덥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뜨거운 시간이 길게 이어졌다. 열대야 일수, 평균기온, 시간당 폭우, 해수면 온도 등에서 '역대 최악' 기록을 갈아치웠다. 기후위기 심각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재난의 심각성을 느끼더라도 그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후위기 문제를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기후위기가 초래한 재난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구조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을 고민하게 되었을까?
기후정의활동가이자 연구자인 한재각은 팸플릿 <기후정의> 글머리에서 "아는 북극곰 있나요?"라고 물었다. 사람들은 빙하가 녹으면서 작아진 해빙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북극곰을 가엽게 여기지만 정작 기후위기를 가속화하고 있는 사회의 구조적 변화에 대해서는 그만큼의 관심조차 두지 않기 때문이다. 기후위기에 관한 잘못된 정보나 기후위기의 극적인 속력과 위협의 크기에 따른 두려움은 앞서 소개한 기후지체 담론에 갇혀 효과적이고 정당한 적응과 완화 정책을 위한 행동을 지체시킨다. '연결', '연대', '참여' 라는 키워드는 주체와 지체 사이의 딜레마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연결
우리는 타인의 노동 없이 삶 자체를 영위할 수 없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인간과 자연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폭염과 폭우, 열대야 속에서도 누군가는 내가 주문한 음식과 물품을 배달하기 위해, 내 공간의 온도를 낮춰줄 에어컨을 만들고 배송하고 수리하기 위해, 내가 주차장에 세워둔 쇼핑카트를 정리하기 위해 일을 한다. 하지만 나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과정에서 누군가는 폭우 속에서 배달을 하다가, 폭염 속에서 에어컨을 수리하다가, 찜통인 마트 주차장에서 쇼핑카트를 정리하다가 목숨을 잃는다. 안타까워하는 마음만으로는 이 구조를 바꿔낼 수 없다. 영국 사회사상가인 존 러스킨은 물건을 살 때 그것을 만든 사람의 삶과 노동조건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연대
평생 노동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최근 대법관 임기를 마친 김선수 전 대법관은 지난 9월 한국노동연구원 세미나에서 물통을 빌려 연대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높이에 차이가 있는 벽으로 둘러싸인 물통에 물을 채울 경우 그 물통으로 담을 수 있는 물의 양은 가장 낮은 벽 부분의 높이에 의해 결정된다. 가장 낮은 부분을 그대로 둔 채 높은 부분을 아무리 더 높게 해 보았자 그 물통이 저장할 수 있는 물의 양은 하나도 증가하지 않는다. 어떤 사회의 포용력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취약계층의 대우를 개선해야만 한다. 취약계층의 대우 수준은 그대로 둔 채 부유하고 강한 계층의 대우만 향상시킬 경우 계층 간 격차를 늘려 상대적 불평등만 심화시킴으로써 사회의 불안정성을 더욱 증대시킬 따름이다." 이는 국제노동기구(ILO)가 1944년 채택한 ILO 목적에 관한 선언('필라델피아 선언')에서 "일부의 빈곤은 전체의 번영을 위태롭게 한다"고 했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참여
연대를 실천하는 방안 중 하나는 '참여'다. 일터에서 단체교섭과 노사협의회 같은 의사결정기구를 적극 활용하거나 전국 수준 혹은 산업 수준에서 기후위기 완화와 적응 방안을 모색하는 기구에 참여하는 방안이 있다. 하지만 노동배제적 정부 기조와 경영 관행은 참여 그 자체의 문턱을 높인다.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이 이뤄지는 곳에 참여하고 발언하고 의사결정을 함께 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일하는 모든 사람이 노동3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여 일터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이 참여를 통해 적응 정책(기후재난에 따른 노동자 보호, 즉 노동환경 개선, 건강권 보장, 작업중지권 보장, 산업전환에 따른 노동전환 지원 등)과 완화 정책(일터의 온실가스·폐기물 감축 및 에너지 효율화, 노동시간 단축 등을 통한 회색 일자리의 녹색 일자리로의 전환) 관련 세부 내용을 만들어야 한다.
기후지체 담론을 넘어서 노동자들이 기후위기 대응의 주체로 나서도록 하면서 연대와 참여를 실현할 대표적인 조직은 노동조합이다. 노동조합에 녹색담당자(green representatives)를 선정하고, 노동자 인식교육과 일상 실천부터 조직하자. 기후위기 적응과 완화를 위한 정책과제들을 노사가 함께 합의한 규범인 단체협약에 담자. 노동을 배제하고 있는 중앙/지방정부 및 산업·업종 수준의 거버넌스 참여를 요구하고 노동의 관점이 산업·노동·환경·안전보건·복지 정책에 담길 수 있도록 방안을 제시하자. 노동자들이 '주체'와 '지체' 사이의 딜레마를 딛고 기후위기 대응 주체로 적극 나서기를 기대한다.
▲기록적인 폭염으로 인해 채소 가격이 크게 오른 24일 오전 서울 시내 한 식품 매장에 '이상 기후 이겨낸 귀한 제철 채소와 과일 많이 아껴주세요'라고 적힌 안내문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 본 칼럼은 프레시안에 동시 게재됩니다.
원문보기 (2024. 10. 25.)
[초록發光] '주체'와 '지체' 사이 딜레마
기후 문제에 왜 노조가 나서야 하느냐구요?
이정희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필자는 지난 8월 '초록發光' 연재 글(☞바로가기 : "왜 노동연구자가 기후위기 문제를 다루냐고요?")에서 노동의제와 기후의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했다. 노동자들은 기후재난의 피해자이면서 온실가스 배출을 수반하는 생산 활동을 직접 수행하는 자이고, 또한 소비자이면서 공동체의 시민이므로, '먹고 사는' 문제와 '(인류가) 죽고 사는' 문제를 통합하여 고민하고 실천해야 하는 주체라는 점을 강조했다.
반응은 다양했다. 노동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업을 준비해야겠다는 다짐도 있었지만, 적지 않은 경우는 여전히 냉소적이거나 대응 모색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기후는 여전히) 우아한/고귀한 문제 같아요", "노조가 왜? (나서야 하는지?)", "조합원들 관심사가 아닙니다"와 같이 여전히 관계성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에서부터 "현장 투쟁에 바빠서…", "한가한 소리로 들려요", "그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어요", 등과 같이 당장의 임금 교섭과 단체협약 갱신 교섭, 또는 불법파견 투쟁과 같은 현안 대응을 하기에도 여력이 없다는 반응도 있었다. "들을수록 어렵네요", "노조가 뭘 할 수 있는지?", "(뭘 하자고) 나설 엄두가 안 나요", 등과 같이 고민은 되지만 손에 잡히는 노조 활동의 내용과 수단을 모르겠다는 반응도 있었고, 또한 "이런다고 뭐가 바뀌나요? 우리가 바꿀 수 있을까요?"와 같은 체념론도 있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최근 읽은 논문 하나가 생각났다.
'기후지체 담론' - 기후행동 미루기
독일에 사무실을 둔 '메르카토르 글로벌 공유지 및 기후변화연구소' 연구진은 2020년에 출간한 논문에서 기후지체 담론(Discourse of climate delay)을 4가지로 유형화하고 이를 뛰어넘기 위한 심층 연구와 실천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논문에 따르면, 기후지체 담론의 첫 번째 유형은 '책임 전가'다.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먼저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럴 의도도 없는데 우리가 온실가스 배출을 감소하면 우리만 손해 볼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두 번째 유형은 '점진적인 해법 추구'다.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면 기후변화가 완화될 것으로 기대하거나(기술 낙관론) 여전히 화석연료를 저탄소 사회로 가는 해법 중 하나로 여긴다. 또한 사회는 지원적이고 자발적인 정책에만 반응할 것이므로 무언가를 제한하는 조치는 폐기되어야 한다고 본다. 세 번째 유형은 '전환 과정의 부작용 강조'다. 화석연료는 개발에 여전히 필요한데 사용을 포기한다면 빈곤층이 어려움에 처하는 한편 현대적 삶을 누릴 기회를 빼앗길 것이고, 사회 취약집단이 그 전환의 부담을 더 크게 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네 번째 유형은 '투항'이다. 배출량 축소를 위한 그 어떤 수단도 현재의 생활방식에 반하는 것이어서 불가능하다고 보거나, 어떤 조치를 취하기엔 너무 늦었기 때문에 우리 운명을 신이나 자연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고 체념한다.
내 문제로 받아들이기
이 담론은 기후변화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것 혹은 노력이 충분하지 않은 것을 정당화한다. 기후정책에 대한 대중과 정치권의 지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는 기후위기 대응 행동을 미루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기후위기 대응의 주체가 되는 첫걸음은, 기후변화가 나의 문제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난 여름을 생각해 보자. 덥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뜨거운 시간이 길게 이어졌다. 열대야 일수, 평균기온, 시간당 폭우, 해수면 온도 등에서 '역대 최악' 기록을 갈아치웠다. 기후위기 심각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재난의 심각성을 느끼더라도 그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후위기 문제를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기후위기가 초래한 재난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구조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을 고민하게 되었을까?
기후정의활동가이자 연구자인 한재각은 팸플릿 <기후정의> 글머리에서 "아는 북극곰 있나요?"라고 물었다. 사람들은 빙하가 녹으면서 작아진 해빙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북극곰을 가엽게 여기지만 정작 기후위기를 가속화하고 있는 사회의 구조적 변화에 대해서는 그만큼의 관심조차 두지 않기 때문이다. 기후위기에 관한 잘못된 정보나 기후위기의 극적인 속력과 위협의 크기에 따른 두려움은 앞서 소개한 기후지체 담론에 갇혀 효과적이고 정당한 적응과 완화 정책을 위한 행동을 지체시킨다. '연결', '연대', '참여' 라는 키워드는 주체와 지체 사이의 딜레마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연결
우리는 타인의 노동 없이 삶 자체를 영위할 수 없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인간과 자연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폭염과 폭우, 열대야 속에서도 누군가는 내가 주문한 음식과 물품을 배달하기 위해, 내 공간의 온도를 낮춰줄 에어컨을 만들고 배송하고 수리하기 위해, 내가 주차장에 세워둔 쇼핑카트를 정리하기 위해 일을 한다. 하지만 나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과정에서 누군가는 폭우 속에서 배달을 하다가, 폭염 속에서 에어컨을 수리하다가, 찜통인 마트 주차장에서 쇼핑카트를 정리하다가 목숨을 잃는다. 안타까워하는 마음만으로는 이 구조를 바꿔낼 수 없다. 영국 사회사상가인 존 러스킨은 물건을 살 때 그것을 만든 사람의 삶과 노동조건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연대
평생 노동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최근 대법관 임기를 마친 김선수 전 대법관은 지난 9월 한국노동연구원 세미나에서 물통을 빌려 연대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높이에 차이가 있는 벽으로 둘러싸인 물통에 물을 채울 경우 그 물통으로 담을 수 있는 물의 양은 가장 낮은 벽 부분의 높이에 의해 결정된다. 가장 낮은 부분을 그대로 둔 채 높은 부분을 아무리 더 높게 해 보았자 그 물통이 저장할 수 있는 물의 양은 하나도 증가하지 않는다. 어떤 사회의 포용력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취약계층의 대우를 개선해야만 한다. 취약계층의 대우 수준은 그대로 둔 채 부유하고 강한 계층의 대우만 향상시킬 경우 계층 간 격차를 늘려 상대적 불평등만 심화시킴으로써 사회의 불안정성을 더욱 증대시킬 따름이다." 이는 국제노동기구(ILO)가 1944년 채택한 ILO 목적에 관한 선언('필라델피아 선언')에서 "일부의 빈곤은 전체의 번영을 위태롭게 한다"고 했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참여
연대를 실천하는 방안 중 하나는 '참여'다. 일터에서 단체교섭과 노사협의회 같은 의사결정기구를 적극 활용하거나 전국 수준 혹은 산업 수준에서 기후위기 완화와 적응 방안을 모색하는 기구에 참여하는 방안이 있다. 하지만 노동배제적 정부 기조와 경영 관행은 참여 그 자체의 문턱을 높인다.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이 이뤄지는 곳에 참여하고 발언하고 의사결정을 함께 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일하는 모든 사람이 노동3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여 일터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이 참여를 통해 적응 정책(기후재난에 따른 노동자 보호, 즉 노동환경 개선, 건강권 보장, 작업중지권 보장, 산업전환에 따른 노동전환 지원 등)과 완화 정책(일터의 온실가스·폐기물 감축 및 에너지 효율화, 노동시간 단축 등을 통한 회색 일자리의 녹색 일자리로의 전환) 관련 세부 내용을 만들어야 한다.
기후지체 담론을 넘어서 노동자들이 기후위기 대응의 주체로 나서도록 하면서 연대와 참여를 실현할 대표적인 조직은 노동조합이다. 노동조합에 녹색담당자(green representatives)를 선정하고, 노동자 인식교육과 일상 실천부터 조직하자. 기후위기 적응과 완화를 위한 정책과제들을 노사가 함께 합의한 규범인 단체협약에 담자. 노동을 배제하고 있는 중앙/지방정부 및 산업·업종 수준의 거버넌스 참여를 요구하고 노동의 관점이 산업·노동·환경·안전보건·복지 정책에 담길 수 있도록 방안을 제시하자. 노동자들이 '주체'와 '지체' 사이의 딜레마를 딛고 기후위기 대응 주체로 적극 나서기를 기대한다.
▲기록적인 폭염으로 인해 채소 가격이 크게 오른 24일 오전 서울 시내 한 식품 매장에 '이상 기후 이겨낸 귀한 제철 채소와 과일 많이 아껴주세요'라고 적힌 안내문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 본 칼럼은 프레시안에 동시 게재됩니다.
원문보기 (2024. 10. 25.)